현금만 받던 가게, 외상 장부가 있던 동네 상점
→ 사라진 신뢰 기반 소비 방식

“카드는 안 돼요”라는 말이 당연하던 시절
예전에는 가게에 들어가기 전에 계산 방식부터 떠올리지 않았다.
현금이 기본값이었고, 카드가 되는 가게는 오히려 특별했다.
지갑 속에 현금이 얼마 있는지가 오늘의 소비 한계를 정해줬고, 그걸 넘기면 그냥 안 사는 게 자연스러웠다.
동네 슈퍼, 구멍가게, 문방구, 정육점, 철물점까지.
POS 기계도 없고, 계산대 위에는 낡은 계산기 하나와 현금통이 전부였다.
카드를 내밀면 “우린 현금만 받아요”라는 말이 돌아왔고, 그 말에 불편함을 느끼기보다는 ‘아, 그렇구나’ 하고 다시 지갑을 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 불편한 방식이었다.
잔돈이 없으면 곤란했고, 현금을 미리 챙기지 않으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그 불편함 덕분에 소비는 늘 한 박자 느렸고, 선택은 더 신중했다.
돈을 쓴다는 행위가 지금처럼 버튼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갑을 열고, 지폐를 꺼내고, 잔돈을 받고, 계산을 마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걸 정말 사도 될까’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 시절의 소비는 편리하지 않았지만, 대신 과하지도 않았다.
외상 장부라는 이름의 신뢰 시스템
현금이 없다고 해서 항상 거래가 끊긴 건 아니었다.
오히려 동네 상점에는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제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외상 장부다.
“오늘은 그냥 외상으로 적어둘게.”
“다음에 올 때 같이 줘.”
이 말은 단순히 돈을 미루는 게 아니라,
‘너는 도망가지 않을 사람’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외상 장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 않았다.
얼굴을 아는 사람, 자주 오던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신뢰가 쌓인 사람에게만 허락되던 방식이었다.
장부에는 이름과 날짜, 금액이 연필로 적혔다.
아주 허술해 보이지만, 그 장부가 돌아가는 시스템은 놀라울 만큼 단단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상을 갚았고,
갚지 않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동네에서 신뢰를 잃었다.
법적 장치도 없고, 계약서도 없었지만
그 사회는 ‘신뢰를 어기는 비용’이 굉장히 큰 구조였다.
그래서 굳이 강제하지 않아도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돈보다 신뢰를 먼저 놓고 거래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말이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사라진 감각들
지금의 소비 방식은 말 그대로 완벽하다.
카드는 기본이고, 휴대폰 하나면 결제부터 송금까지 다 된다.
외상은 사라졌고, 대신 신용 점수와 한도가 생겼다.
신뢰는 개인 사이의 관계에서
시스템과 데이터로 옮겨갔다.
편리해졌고, 빠르고, 안전해졌다.
누군가를 직접 믿지 않아도 되니 마음도 덜 쓰인다.
하지만 그만큼 사라진 감각도 있다.
사람을 기억하고, 얼굴을 익히고, 관계를 쌓아야만 가능했던 소비 방식.
“이번엔 내가 믿어줄게”라는 말이 오가던 순간들.
현금만 받던 가게와 외상 장부는
단순한 옛날 풍경이 아니라
신뢰를 기반으로 돌아가던 작은 사회의 단면이었다.
지금은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유지될 수 없다는 걸 안다.
사람이 많아졌고, 이동이 잦아졌고, 익명성이 커졌다.
시스템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사회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묘한 그리움이 남는다.
돈을 쓰는 일이 사람을 대면하는 일이었고,
소비가 관계의 일부였던 시대.
효율은 느렸지만, 기억은 오래 남았던
그 신뢰 기반 소비 방식은
지금도 가끔 이렇게 마음속에서 다시 꺼내 보게 된다.
아마 사라진 건 방식이 아니라,
사람을 먼저 보던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